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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녕최씨 시조는 고려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를 지낸 최천로(崔天老)공이다. 그러나 사기나 다른 문헌에는 삭녕최씨 시조를 최유가(崔瑜價)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최유가공이 사기(역사의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삭녕최씨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삭녕최씨 구보(舊譜)에는 최유가공 앞에 최천로 공이 비조(鼻祖)로 되어 있고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도마리 기현에 있는 참의공(參議公: 諱 永潾, 號 石圃, 文靖公의 1子)의 묘갈음기(墓碣陰記)에도 「崔氏系出朔寧 平章事 諱 天老 爲始祖」라 하여 천로공이 시조임을 명백히 하였으며 또한 전남 구례 잔수 선영에 잇는 간호공(艮湖公: 諱 攸之, 砭齋公의 子, 13世)의 묘갈명에도 천로공을 시조로 명기하였다. 다만, 다른 비문에서 흔히 천로공은 기재하지 않고 유가공의 후손이라 한 것은 유가공이 역사에 뚜렷하기 때문이며 그 또한 천로공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이다.
삭녕 최씨로써 사기(史記)에 최초로 나타난 최유가(崔瑜價, 一作 兪嘉)공은 고려중기의 제19대 명종(明宗)때 역시 문하시랑평장사(正2品)를 지냈다고 기록되어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명종 20년(1190, 庚戌)에 국자감 대사성(國子監 大司成)과 추밀원 부사(樞密院 副使)를 거쳐 명종 24년(1194, 甲寅)에는 참지정사 (參知政事, 종 2품)를 역임하고 왕에게 연로함을 들어 물러나기를 간청하니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 칭송하였다고 하였다. 최천로공과 최유가공은 한집안에서 서로 전후하여 똑같이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냄으로써 시조공 때부터 세거해 오던 삭녕군 마장면 대전리 괴음촌을 「평장동」(平章洞)이라 고쳐 부를 정도로 유명하였다 한다.
이와 같이 최유가공은 시조 공에서 이어 삭녕최씨 가문의 두 번째 인물로 들어나 가문을 크게 빛내었기 때문에 삭녕최씨 중시조라 일컫는 것이다. 묘는 경기도 고양에 있다고 구보(舊譜)에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찾을 길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숭인사(崇仁祠)는 우리 삭녕최씨 시조사당으로서 부사공파에서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595번지의
저존재(著存齋: 지평공 5世 제각)옆에 세우고 1988년 11월 5일 전국의 많은 종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장사공 양위분(諱 天老, 瑜價兩公) 위패 봉안식(位牌奉安式)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시조사당 향사(享祀)는 매년 음력으로 삼월 삼짇날(3月3日) 올리고 있으며 많은
종원들의 참사를 바라고 있다.
우리 삭녕최씨 시조사당인 숭인사의 묘정에「高麗門下侍郞平章事朔寧崔公廟庭
碑銘」을 세우고 1988년 11월 6일 묘정비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묘정비명은 부사공의 21세손 인찬(寅巑: 前道議員 慶尙大敎授)씨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