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의 숨결 > 원주
행원공의 자는 탁이(卓爾)이고 행원(杏園)이며 태허정 최항(崔恒)선생의 7세 종손으로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영원군(寧原君) 변(抃)의 장자로 명종 12년(1557)에 태어나 선조18년(1585)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공릉참봉이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대왕을 호종하여 의주로 가서 행재소인 용만관에서 실시한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고 선조29년(1596) 형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어 서장관으로 사신을 수행하여 연경 (燕京)에 다녀와서 병조정랑으로 승차하여 세자시강원사서를 겸하였다. 정유재란 때에 왜군은 해안을 점거하고 있고 구원병으로 온 명군의 횡포가 심하여 군량공급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풍채가 괴위(魁偉)하고 신장이 8척이 넘고 체격이 크고 뚱뚱한 공을 독운어사(督運御使)로 임명하니 횡폭한 명군들도 공의 위풍에 눌려 복종하매 밤낮을 가릴 겨를도 없이 재촉하여 배와 수레가 연접하도록 바다와 육지에서 번갈아 수송(輸送)함으로서 군 량보급이 원활하여져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불려 들어와서 세자사강원 필선(弼善) 사간원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헌부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순창군수로 나갔다가 담양부사로 승진하여 선정을 베풀어 통정대부로 승진되고 호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 지를 역임하고 광해군 1년(1609)에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黃海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며 공의 위로 3대에 걸쳐 증직 (贈職)의 은유(恩有)가 있었다. 광해군 3년(1611) 10월 21일에 졸하니 춘추55세였으며 행원공 유고(杏園公 遺稿)5권을 남기었다. 공은 임진왜란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一등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二등으로 녹훈되었다.
배위 정부인 풍산심씨(豊山 沈氏)는 증 이참(吏參) 일장(日將)의 따님으로 3남 3녀를 두시었는데 장자 호(皥)는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내고 차자 환(皖)은 생원이고, 3자 교(皦)는 음직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세 딸의 사위는 김사상(金士尙) 김엽(金曄) 황입진(黃立震)이다.
공이 졸 후에 큰아들 호(皥)가 묘지를 구하나 얻지 못하던 중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1년 전에 작고하여 광주 문정공 묘소좌측에 장례한 어머니께서 현몽하여 이르기를 복지(福地)는 동쪽에 있다하여 함께 가다가 마른 소나무아래에 이르러 “이곳이 바로 그 자리다” 하였다.
호(皥)가 놀라 잠에서 깨어나 지사(地師)를 데리고 똑바로 동쪽으로 가서 강원도 원주관아 서쪽인 경장리(敬莊里)에 이르러 보니 경치가 꿈속에서 본 것과 같아 지사가 마른 소나무 밑을 짚어내어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터를 잡고 공의 상여(喪輿)와 모친의 영구(靈柩)를 옮겨 함께 여기에 장례하니 공이 돌아가신 해 12월 갑오일이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3리 묘하에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월담공의 자는 호여(皥如)이고 호는 월담(月潭)이며 행원공의 장자로 선조15년(1582) 2월 1일 남양 칠곡에서 출생하여 음직으로 세자익위사우세마 (世子翊衛司右洗馬)가 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제천현감(堤川縣監)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인조원년(1623)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도사(慶尙道 都事)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호조정랑(戶曹正郞)으로 재직중 인조3년(1625) 8월 10일 후사없이 44세 졸하니 아우인 독송재 교(獨松齋 皦)의 차자 만년(萬年)으로 하여금 후사를 삼았다.
배위 숙인 전주이씨(全州 李氏)는 딸만 셋을 두었는데 유두입(柳斗立) 이관징(李觀徵) 윤책(尹策)에게 출가하였다.
묘는 행원공의 묘 근처인 원주시 지정면 신평리 임좌(壬坐)이며 묘비가 있다.

증산공 최극량(甑山公 崔克良)

증산公의 諱()는 克良(극량)이며 사정공 수걸(司正公 秀傑)의 장자(長子)이신 참봉공(參奉公) 濬亨(준형)의 현손(玄孫)으로 迪順副尉副司正(적순부위부사정) () ()와 參議(참의) 咸陽(함양) 朴默(박묵)따님이신 모친 사이의 51녀중 차남(次男)으로 생년미상이다. 行誼(행의)가 있어 蔭職(음직)으로 通訓大夫(통훈대부)에 올라 活人別提(활인별제)에 이어 仁祖22 1644年 全義縣監(전의현감)에 除授(제수)되시고 仁祖26 1648年 甑山縣令兼平壤鎭管兵馬節制都尉(증산현령겸평양진관병마절제도위)에 재직중 孝宗(효종) 卽位年(즉위년) 1649 523日에 卒하시어 原州 所夜未甲坐(원주 소야미갑좌)에 모시었다. 配位(배위) 延安金氏(연안김씨)는 淸州牧使(청주목사)를 지내시고 左承旨(좌승지)에 贈職(증직)()의 따님이고 延興府院君(연흥부원군) 弟男(제남)의 孫女이며, 外祖(외조)는 郡守(군수) 草溪(초계) 鄭默(정묵)으로 114日 卒()하시어 墓는 雙封(쌍봉)으로 모셨다. 三男三女를 두시었으니 長子(장자) 應夢(응몽)은 蔭職(음직)으로 通訓大夫(통훈대부)로 監役(감역)과 河陽縣監(하양현감)을 지내시고 通政大夫(통정대부) 左承旨(좌승지)에 증직되셨으며 次男(차남) 應望(응망)은 無後(무후)하며 三子(삼자)는 應昌(응창)이고 長女(장녀)는 大邱人(대구인) 徐坦履(서탄리)에게 次女(차녀)는 全州人(전주인) 李挺麟(이정린)에게 三女(삼녀)는 德水人(덕수인) 李穉(이치)에게 出嫁(출가)하였다. 原州市 文幕邑 桐華里 山51(원주시 문막읍 동화리)에서 2006 4 9일 陰城郡 生極面 防築里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5-1番地(번지) 正東向(정동향) 酉坐(유좌)로 合窆 移葬(합폄 이장)

 

승지공 최응몽(承旨公 崔應夢)

父親(부친) 甑山公(증산공) () 克良(극량)은 通訓大夫行甑山縣令平壤鎭管兵馬節制都尉(통훈대부행증산현령평양진관병마절제도위)를 지내셨고 母親(모친) 延安金氏(연안김씨)는 淸州牧使(청주목사)를 지내시고 左承旨(좌승지)에 贈職(증직)()의 次女(차녀)이고 延興府院君(연흥부원군) 弟男(제남)의 孫女(손녀)이며 外祖(외조)는 郡守(군수) 草溪(초계) 鄭默(정묵)으로 三男三女中(삼남삼녀중)長男(장남)으로 出生(출생)하셨다. 蔭職(음직)으로 監役(감역)을 시작으로 奉正大夫行司贍寺主簿(봉정대부행사섬시주부)를 거쳐 1676年 肅宗(숙종) 2年 通訓大夫行河陽縣監大邱鎭管兵馬節制都尉(통훈대부행하양현감대구진관병마절제도위)를 歷任(역임)하셨고 獨子(독자)인 柱岳(주악) 1728년 英祖(영조)4年 戊申亂(무신란) 당시 通訓大夫行漢城庶尹(통훈대부행한성서윤)으로 功()을 세워 奮武原從一等功臣(분무원종일등공신)에 錄勳(녹훈)됨에 따라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贈職(증직)되셨다. 1216日 卒하니 墓()는 原州市 文幕邑 桐華里 山 五十一番地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산51번지) 子坐(자좌)() 淑夫人(숙부인) 高靈朴氏(고령박씨)는 監察(감찰) (한녀)요 挹翠軒(읍취헌) 誾后(은후)이고 外祖(외조)는 通德郞(통덕랑) 順天(순천) 朴愼(박신)이다. 1705年 肅宗(숙종)31年 乙酉(을유) 1 10日 卒()하시어 公墓(공묘) 左肩(좌견) 子坐(자좌)에 모셨다. 原州市 地向谷面 自甲村 子坐(원주시 지향곡면 자갑촌 자좌)에서 2006年 閏()7月 陰城郡 生極面 防築里 山5-1番地(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5-1번지) 正東向(정동향) 考墓下(고묘하) 酉坐(유좌)로 移葬(이장)


도정공 최주악(都正公 崔柱岳)


父親(부친)은 應夢(응몽)으로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通訓大夫河陽縣監大邱鎭管兵馬節制都尉(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행하양현감대구진관병마절제도위)를 지내셨다. 모친 淑夫人(숙부인) 高靈朴氏(고령박씨)는 監察(감찰(한녀)요 挹翠軒(읍취헌) () ()이다. 1651년 孝宗(효종) 辛卯年(신묘년) 출생하여 1677년 肅宗3(숙종3) 丁巳年(정사년) 進士試(진사시)에 합격하고 肅宗12(숙종12) 丙寅年(병인년)社稷參奉(사직참봉)을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서 肅宗18(숙종18) 壬申年(임신년) 丹城縣監(단성현감), 肅宗22(숙종22) 丙子年(병자년) 刑曹正郞(형조정랑)이 되시고 肅宗23(숙종23) 丁丑年(정축년) 价川郡守(개천군수)에 除授(제수)되시고 肅宗25(숙종25) 己卯年(기묘년) 監察(감찰)이 되시고 肅宗26(숙종26) 庚辰年(경진년) 戶曹正郞(호조정랑)이 되셨고 同年(동년) 載寧郡守(재령군수)에 除授(제수)되었다. 肅宗29(숙종29) 癸未年(계미년) ()을 軍職(군직)에 임명할 것을 賑恤廳(진휼청)이 청하여 副司果(부사과)가 되고 다시 高城郡守(고성군수)가 부임하나 肅宗31(숙종31) 乙酉年(을유년) 1 10일 母親喪(모친상)을 당하신다. 肅宗34(숙종34) 戊子年(무자년) 工曹佐郞(공조좌랑)에 이어 金堤郡守(김제군수)에 除授(제수)되시고 肅宗41(숙종41) 乙未年(을미년) 翊衛(익위)에 이어 韓山郡守(한산군수)에 除授(제수)되시나 身病(신병)을 얻어 요양하게 되신다. 肅宗42(숙종42) 丙申年(병자년) 南原府使(남원부사)에 除授(제수)되시고 肅宗45(숙종45) 己亥年(기해년) 副司果(부사과)에 재차 除授(제수)되시고 英祖1(영조1) 乙巳年(을사년) 司饔僉正(사옹첨정)에 이어 英祖3(영조3) 丁未年(정미년) 漢城庶尹(한성서윤)이 되시어 이듬해인 英祖4(영조4) 戊申亂(무신란) 當時(당시) 通訓大夫行漢城庶尹(통훈대부행한성서윤)으로 功()을 세워 奮武原從一等功臣(분무원종일등공신)에 錄勳(녹훈)되고 英祖5(영조5) 己酉年(기유년) 工曹正郞(공조정랑)에 이어 尙衣僉正(상의첨정)에 除授(제수)되시고 이듬해인 英祖6(영조6) 庚戌年(경술년) 品階(품계)가 通政大夫(통정대부)에 이르렀고 副護軍(부호군)에 이어 折衝將軍(절충장군)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에 이후 敦寧都正(돈녕도정)을 歷任(역임)하셨다. 1735年 英祖11(영조11) 乙卯(을묘) 6 14日 天壽(천수)를 다하시고 卒()하시니 享年(향년) 85세이다. 宗家(종가)에 보관중이던 文集(문집) 遺稿(유고) 十卷(십권)은 애석하게도 失傳(실전)되었으며 문집으로 계서집(溪西集)이 있다. ()는 原州地向谷面自甲村考墓下子坐(원주지향곡면자갑촌고묘하자좌)이다. 配位(배위) 豊川任氏(풍천임씨)는 府使(부사) 暎女(영녀)요 外祖(외조)는 敎官(교관) 綾城(능성) 具時望(구시망)이다. 系子(계자)는 宇大(우대)요 生父(생부) 命立(명립)이다. ()는 漢陽人(한양인) 趙綰(조관)에 出嫁(출가)하였다. 原州市 地向谷面 自甲村 考墓下 子坐에서 2006年 閏7月 陰城郡 生極面 防築里 山5-1番地 正東向 考墓下 酉坐로 移葬 원주시 지향곡면 자갑촌 고묘하 자좌에서 2006년 윤7월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5-1番地 정동향 고묘하 유좌로 이장